
작가 소개
이 책은 '월급사실주의'라는 문학 동인에서 출간한 책이다. 이 동인은 장강명 작가가 비슷한 문제의식을 품은 동료 작가들을 모아 2022년에 결성하였다. 의도적으로 만나지도, 대표 같은 것을 정하지도 않았지만 규칙은 있다.
1. 한국사회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 비정규직 근무, 자영업 운영,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노동은 물론, 가사, 구직, 학습도 우리 시대의 노동이다.
2. 당대 현장을 다룬다. 수십 년 전이나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쓴다. 발표 시점에서 오 년 이내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다.
3. 발품을 팔아 사실적으로 쓴다. 판타지를 쓰지 않는다.
4. 이 동인의 멤버임을 알린다.
이러한 규칙 하에 기획된 동인에 2024년 새로 합류한 작가들은 남궁인, 손원평, 이정연, 임현석, 정아은, 천현우, 최유안, 한은형이다. 장강명 작가는 현실 문제를 비판하고 경고를 하는 작품들이 사라지고 있어 문학이 점점 힘이 없어진다고 꼬집었다. ‘원래 거대한 사건은 안에서 평가하기 어렵고 처음 보는 일이라면 더 그렇다.’는 말을 하며 ’치열하게 쓰겠습니다.‘라고 했는데, 그 마지막 문장이 마음 속에서 크게 공명했다. 장강명 작가의 글을 조금 더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첫 소설집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는 2023년 9월에 나왔으며 김의겸, 서유미, 염기원, 이서수, 임성순, 장강명, 정진영, 주원규, 지영, 최영, 황여정 작가의 글이 실렸다.
제목보고 상상하기
처음 책 제목을 접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 드디어 북커버를 살 때인가?'였다. 습관처럼 가면을 쓰는 나에게 이 제목은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분석해보면, '인성에 비해'는 타인의 인성을 함부로 평가했다는 의미가 담겨있고 '잘 풀린'이라는 수식은, 잘 풀린 사람을 배아파하는 것으로 보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 책을 들고다니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 들어서 부끄러울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놀라기도 했다. 제목을 듣는 순간 이런 판단을 내렸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그만큼이나 신경쓴다는 반증이기도 했으니까.
한편으로는 인성과 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착한 동료보다 일 잘하는 동료가 좋다고 말하는데, 사실 일을 오래 하다보면 아무리 똑똑해도 얌체같은 사람이나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엄청나게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인성을 우선시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일을 못하면 화가 나기도 하지만 인성이 되어있으면 그래도 웃을 때가 있으니까. 그리고 설마, 일 못하는 직원이 모든 일을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능력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도 능력이다.
아무튼, 도대체 이 책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지 정말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활기찬 아침입니다』 - 남궁인
『피아노』 - 손원평
『등대』 - 이정연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 임현석
『두 친구』 - 정아은
『빌런』 - 천현우
『쓸모 있는 삶』 - 최유안
『식물성 관상』 - 한은형
줄거리와 짧은 감상
서평에서 '혼자 힘으로 돈을 벌어 자기 자신을 먹여 살린다는 것.'을 숭고한 일이라고 평가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밥벌이는 지난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숭고한 일이라고 말해주니 어쩐지 훨씬 할만하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출근길에 울면서 펼친 이 책 퇴근길에 웃으면서 다시 보자’는 말에는 공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마냥 웃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을 보면 이 동인을 기획한 장강명 작가가 쓴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라는 글이 있다. 배치상 뒤에 있는 이 글을 소설의 내용보다 먼저 꺼낸 이유는 전체를 조망하는 글을 먼저 읽는 것이 각 단편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 작가가 쓴 단편 소설 모음집이 아닌 '지금, 여기 당대의 먹고사는 문제'라는 하나의 주제를 품고 여러 작가들이 내놓은 글의 모음집이다. 으레 '소설'을 읽고 나면 마음이 좀 말랑해지기 마련인데 이 책은 오히려 차갑게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일을 하다 보면 종종 저열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는데, 그 부끄러운 순간들을 잊지 못하게 차곡차곡 모아 전시해둔 소설집 같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선의로 가장 좋은 선택을 하거나 상대방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지 않는다. 4번째 단편인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은 대기업 화장품 프랜차이즈 본사 영업부에서 일하는 '진영'과, 진영이 관리하는 새 점포의 점주 '선영'이 만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렸다. 온라인 시장이 대세를 이루면서, 오프라인 영업의 치열한 현장을 담당하는 진영의 삶에는 진심이나 마음같은 것이 들어갈 여유가 없다. 진영은 점차
'무능해서 비웃음을 사느니, 약간은 비열한 게 더 낫다' (105p.)
고 생각하며 살게 된다. 그런 진영에게 선영은 턱없이 잘 속고 쉽게 추억에 잠기는 사람이었다. '다음에 샘플을 더 가져올게요.' '젊은 분이 고생하시니까.' 같은 말을 듣고는 고맙다며 허둥지둥 아몬드를 찾아 진영에게 안겨주는 사람. 하지만 사실 진영이 한 말들은 그저 잘 먹히는 멘트일 뿐이었다. 그런 텅 빈 말에 순진하게 감동하는 선영을 보며 나는 괜히 화가 난다. 사람들이 내게 했던 말도 진심 없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리라.
그러다 문득, 일터에서 나의 모습에 대해 떠올린다. 나도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것 같은데. 주어진 일을 더 멋지게 해내고 싶어서 야근과 주말 근무를 자발적으로 하고, 회사 동료들 일에도 진심으로 대했었다. 하지만 근속년수가 길어진 지금은 좀처럼 마음을 담기가 힘들다. 하소연을 하는 회사 동료의 말에 '정말 힘들겠어요ㅜㅜ'라고 대답하면서 눈은 모니터 속 숫자를 쫓고 있다. 야근을 하면 더 많은 근거자료를 찾을 수 있음을 알지만 짧은 고민 끝에 정시에 퇴근한다. 이것을 깨달을 때면 어쩐지 씁쓸해진다.
항상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것이 난제였다. 여기서 더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다가 온 마음을 다 소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걸로 나만 사라지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쓸 마음마저 다 써버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더이상 그러지 않기 위해, 지속 가능성을 위해 아껴두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어쩌다 타인의 진심을 만날 때면 이런 내가 부끄러워진다. 진영도 그랬던 것이 아닐까.
'선영에겐 뚜렷하고 선명한 감각이 자신에겐 없었다. 경험과 취향이 뒤엉킨 애호의 감정이, 기술력과 품질과는 명백히 다른 마음의 자리가. 마음이라니.' (114p.)
일터에서의 우리의 마음은 손원평 작가의 단편 『피아노』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허브 농장에 놀러갔을 때 향과 맛이 좋아 샀던 차인데 향기는 다 날아가고 이제는 쓰고 떫은 세월의 맛만 느껴졌다.' (39p.)
이 첫 문장은 주인공 '혜심'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혜심은 아이들을 가르쳐 단정한 사람으로 자라나게 돕는 일을 좋아했다. 그 마음으로 공부방을 운영했지만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며 차츰 아이들에 대한 관용도 낮아졌다. 마침내 공부방을 접기로 결심하고 물건을 정리하는데, 거실 한구석의 아동용 피아노를 보게 된다.
'일을 낭만으로 여기고 열정이 돈을 대신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시절, 공부방에 공부를 하러 온 아이들도 휴식 시간에 잠깐 피아노를 친다면, 그렇게 아이들의 선율이 공부방을 채운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서 들였던 피아노였다.' (45p.)
일을 낭만으로 여기는 것이 허영심이라는 현실이 너무나 씁쓸했다. 그냥 씁쓸한 게 아니라 너무 써서 다시 뱉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피아노는 혜심에게 희망찬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고통스러운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처분하기를 시도했지만, 피아노 의자 속에 넣어둔 '현실'과 '마음'이 뒤엉켜 결국 혜심은 피아노를 다시 찾아오는 결정을 내린다. 마음이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를 '준용'에게 마지막으로 수학을 가르쳐주며. 이 단편은 책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준다.
이 소설은 다양한 직종의 이야기가, 종사하고 있지 않다면 모를 만큼 '진짜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도 상당히 인상깊다. 작가들이 높은 사명감을 가지고 자료 조사에 철저히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모를 수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생소했고, 멋있어보이는 사람들도 '밥벌이'를 하는 입장에서는 많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어쩐지 웃음이 났다.
나만 직장에서 너무 힘든 것 같고, 못된 것 같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자.
책 속의 또다른 문장들
『오늘도 활기찬 아침입니다』
36p. 나는 열심히 살고 있었다. 친구들도 모두 열심히 살고 있었다. 부지런히 뉴스를 진행하고 방송을 맡고 행사에서 마이크를 잡고 지인들을 챙겼다. 부지런히 헤어를 고정하고 메이크업을 받고 잠들기 전 내일 의상을 고민하고 인스타를 업데이트했다. 영원한 건 없어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건 있었다. 어떤 미래가 있을지 몰라도 지금 주어진 일은 내가 하고 싶던 것이었다. 꿈을 이룬 사람은 불평해서는 안 되었다.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104p. 빅뱅을 흥얼거리는 선영과는 음이 맞지 않았다. 오후는 이상한 화음으로 흘러갔다.
109p. "그래도 가족예요." 그렇게 말할 때 진영의 마음이 텅 비어 있다는 걸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두 친구』
109p. 가족이 아닌 어딘가에서 소속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면에서, 지현에게 조무사 일은 일종의 구원이었다.
- 나는 항상 한 가지 얼굴만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서 너무 괴로울 때는 견뎌낼 다른 곳이 필요했다. 그 곳들은 나에게 일종의 도피처나 충전소가 되어 주었다.
『쓸모있는 삶』
192p. 하지만 오해는 소통의 기본값이고, 오해를 줄이는 데 민감한 사람이 가장 괴로운 법이었다. 완벽한 소통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고.
195p. 발화자가 쓴 쉼표 하나, 숨 한 번까지 제대로 표현하려는 노력이 고고한 비기가 아니라 쓸데없는 신경증일 수 있다는 것, 불필요한 단어를 떼어내고 적당히 정리된 문장으로 속도감 있게 상대의 말을 전달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게 더 돌돌한 방법이라는 것.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우울의 겹이 한 층씩 덧대졌다. 이런 시대에 통역사의 노동이란 쓸데없는 집념과 열정의 산물인가 싶었고, 하루에도 네댓 번씩 밀려드는 자괴와 열등감에서 나는 좀처럼 발을 빼내지 못하고 있었다.
- 발화자나 글쓴이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는 것. 즉, 행간을 읽어내는 능력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통역사에게는 그것이 쓸데없는 신경증이라고 평가된다는 것이 슬펐다. 그 능력이 가장 중요할 직업일 줄만 알았는데. 이래서 내가 하는 일을 너무 사랑하면 안된다고 하던가.
남겨진 질문들
1. 책 제목이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인 이유가 무엇일까?
- 어쩌면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은 소설 속 누군가를 저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일을 하다 어쩔 수 없이 '못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자책하며 내린 평가가 아닐까. 그러니까 이 소설은 사실 '너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야. 그러니 네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라고 위로를 건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에서 마지막에 진영은 왜 아무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 그동안 진영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위안을 건네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선영의 점포를 마지막으로 방문하면서 최선의 호의를 담고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진영은 이제,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따라 웃는 다른 부서원들과 달라져 버렸다.
3. 혜심이 정말 찾고 싶었던 것은 중고거래로 모은 돈이었을까, 아니면 아이들의 마음이 담긴 편지였을까?
- 아마도 편지였을 것이다. 혜심은 원래 낭만이 있는 사람이었다. 녹록지 않은 현실때문에 지금은 자기 자신과 아이들에게 줄 마음을 다 써버려 전부 포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준용을 통해 자신이 잃어버린 텅 빈 마음을 비로소 알아채고 피아노를 되찾아 온 것이라 생각한다. 비어버린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마음 뿐이니까.
4. 『두 사람』에서 지현은 마지막에 한우 세트를 받았을까?
- 지현 성격에 아마도 받지 않았을 것 같다. 승미가 선물을 보낸 것은 지현이 정말 고마워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소비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보인다. 아마 지현도 알았겠지. 나도 동일하게 받지 않았을 것 같은데, 모임 분들 중에는 승미가 인생에 중요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선물은 받고 연락을 이어가지는 않으시겠다는 분도 계셨다. 이것도 일리가 있다고 느껴서 웃음이 났다. 정답은 없으니까.
5. 『등대』에서 복어의 독이 남아 있는 복어 회를 보고 설희는 어떤 마음을 가졌던 걸까?
- 모임원 다수가 "복어 독을 먹고 죽으려고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설희가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어 독을 먹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끝내 꺼내지 않은 말이었지만. 78p의 "그러다 잠깐 자신을 구석으로 몬 사람들에게 테트로도톡신을 먹인다면 어떨까 하는 공상에 빠졌다."는 문장을 보고 그런 생각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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